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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조선을 비롯한 일본의 식민지 국가들은 독립하게되고, 고레카와는 한국 임시정부 경찰에 잡혔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을 평등하게 대우했던 것과 평등하게 대한 것에 반발하는 몇몇 일본인 직원을 해고하고 직원 자녀들의 의무교육을 시켜주는 학교를 만들은 점 때문에 한국인의 구명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재산은 몰수 당하여 다시 빈털터리로 1946년 1월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자마자 고레카와는 화를 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신년에 나온 맥아더의 일본 점령정책 때문이었다. 

 

점령정책의 대략적 내용은 지금 일본 식량생산량에 의한 일본의 적정인구는 4천만명이면 충분하니 애 많이 낳지말아라 라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일본의 인구를 묶어둠으로써 점령을 수월하게 해 나가기 위함이었겠지만 나름 논리도 있다. 

 

황폐화된 농토와 일본의 패망으로 해외에있던 일본인 450만명이 일시에 일본으로 귀국하니 식량이 더 부족한 것은 사실. 

 

사망자에 대한 보상심리로 아이를 많이 갖게 되는 것도 있었기에 이것을 막으려고 맥아더는 아이는 2-3명이면 충분하다고 했음. 

 

그러나, 맥아더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있었고 이 발언을 두고 미국 내 종교단체에서 공격하자 나중에는 중립적의견으로 바꿈. 

 

아무튼, 맥아더 때문에 일본이 세계 일류국가가 될 수 없게 생겼다고 생각하고 고레카와는 이모작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비가 많이 와서 이모작을 쉽게하지는 못하는 일본이었지만  

 

고치지방에선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을 뒤로하고 그 쪽으로 가게된다. 

 

이 상황에서는 고레카와가 예전에 식민지 조선의 백두산에서 농작물을 재배했던 과거의 기억이 동기부여가 되었다.  

 

백두산 일대에서 총을들고 싸우던 김일성 부대의 식량공급 방법을 연구하면서 백두산에서 홍환이라는 감자과 농작물의 재배를 해냈다고 한다.  

 

모두가 불가능 할 거라는 일이 현실화 가능하다는 걸 백두산에서의 경험을 통해 맥아더를 이겨보겠다고 도전하게 됨. 

 

고치 지방 근처에는 쿠로시오 난류가 흘러 일반 농지보다 파종이 1달 빨랐다는 걸 알고 그와 비슷한 환경의 땅에서 정부의 도움을 받아 이모작을 하려하나  

 

앞뒤가 꽉 막힌 농림부 관리를 보고 실망한 뒤에 6개월 동안 다른 농가의 협조를 얻기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아서 집에 왔는데 이가 버글거리는 옷을 보고 아내가 펑펑 울었다고 함.  

 

그 후로는 이모작을 혼자하기로 마음먹음. 

 

그러나, 이런일을 혼자 돈도 안벌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는 연합국의 폭격을 얻어맞고 방치되어있던 부품공장에서 망가진 함석판을 재생시켜 판매하는 작업으로 비용을 충당했다.  

 

사실 그 전까지는 함석판을 재생않고 바다에 버리는 중이었고, 갖다 버리는 폐품을 돈을 5엔씩 받고 고레카와가 사니까 당연히 좋다고 팔았다.  

 

그리고, 제철회사 때 아는 얼굴도 많아서 쉽게 일을했다. 

  

당시는 전후라서 당연히 지붕의 재료가되는 함석판이 필요할 시기였기에 재생만 하면 바로 엄청난 이득을 보고 팔 수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알게 된 함석판 판매업자는 따지러 왔으나 원래 버리던 걸 5엔에  고레카와가 사줬으니 따질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후 1951년 고레카와는 어느 정도 직원들과 가족들을 먹일 여유가 생기자 다시 이모작 연구를 하면서, 고레카와 농업연구소를 세운다. 

 

연구소를 세우고 이모작에 성공하자 아사히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된다. 

  

이 신문의 보도가 나가자마자 취재진이 문전성시로 오기는 했으나, 수도요금을 체납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정사정해서 수도가 끊기지 않게 되고, 여러 민간기업에서 "나도 일본인 입니다." 하면서 도움이 오자, 그제서야 대규모 연구가 가능해졌다.  

 

그 후로, 1955년부터는 면화재배연구를 했다. 

 

면화와 쌀 농업 연구소를 1954~1959년까지 하게 되자, 이모작이 보편화 되어서 맥아더에게는 사실상 판정승 상태.  

 

어느정도 기반이 생기자, 이대로 시간을 뺏기면 내 꿈을 완성 못하겠구나 하고 1960년 63세의 나이로 다시 주식시장에 돌아오게 된다! 

 

드디어 주식이야기가 펼쳐지는데 1960년에 친지로부터 빌린 300만엔으로 시작했다. 

 

이것으로 번 돈으로 대출금과 이자, 아이들 학비, 생활비를 대면서 하게 되자 필사적으로 매매를 하기 시작했다. 

 

주식투자는 마치 토끼와 거북이와 같다. 라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매집을 하는 스타일로 매매했다. 

 

여기서 나온 거북이 3원칙은 

 

1. 종목은 수면하에 있는 우량한 것을 선택하여 기다린다. 

2. 경제, 시세의 동향으로부터 항상 눈을 떼지 말고, 스스로 공부할 것 

3. 과대한 생각은 하지 말고 수중의 자금 범위안에서 행동하기 

 

22년 만에 컴백한 주식시장은 엄청난 붐을 형성했다.  

 

그도 그럴 것중에 하나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일본 특수였다. 이를 통해 일본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수출 붐이 일어나면서 경제는 급성장했다. 

 

주가로 살펴보면 도쿄 증시 평균주가는 1950년 7월 6일 85엔 25전에서 1953년 2월 4일 474엔 43전으로 5배나 주가가 상승했다. 

 

하지만,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중태설이 전해지자 불확실성의 증가로 10% 대폭락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일본 증시의 상승요인 두 번째는 진무경기시세 덕이다. 

 

1953년 5월까지 하락하던 장은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로 서서히 반등하다가 

  

1954년 불황탈출과 1955년 2월 8일 소련 정변에 의한 불가닌 수상의 탄생을 환영하여 군수품을 중심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1957년 5월 4일 도쿄 지수는 595엔 46전의 고가를 냈다. 그러나 나흘 뒤 국제수지 적자로 긴축을 취하자 472엔 까지 떨어지고 일단락된다. 

 

1958년 6월, 9월에 기준금리 인하를 하자 이와토 경기라는 42개월 간의 호경기가 시작된다.  

그러면서 거래량도 177억 5천 779만 주(58년)에서 317억 8천 203만 주(59년)으로 급증했다.  

 

하루 거래량은 1959년 12월 2일에 1억 8716만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하며 붐을 연출했다. 

 

그러면서 1961년 7월 18일에는 1829엔까지 상승하게 된다. 원인은 개인들이 투자신탁회사에 맡기는 돈이 급증하자 투신에서 매수를 한 덕이 컸다고 함. 

 

1960년 안보투쟁 상황에서 일본 내각에서 엄청난 설비투자를 목표로 하게 되자 고레카와는 땅값 폭등을 예상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매매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는다. 

 

첫 매매는 일본 내의 대공장 건설 계획자료를 분석하면서, 근처 교통망 환경등을 살핀 뒤에 고레카와 농업연구소가 있던 시(市)에서 8km 떨어진 곳의 수십만평 토지를 사는 것이었다. (친구의 도움을 받음) 

 

얼마 뒤, 이 주변에 뉴타운이 개발된다고 하자 평당 300엔에서 1500엔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게 3억엔을 1966년에 손에 넣고 매매를 시작했다. 

 

1976년 10월에는 그 3억엔이 6억엔으로 불어있었다. 

 

그 돈으로, 이제 큰 거 한 번 해보자 하면서 산 주식이 일본시멘트였다.  

 

과거로 돌아가서, 1973년 당시 내각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선 해안형 중화학공업에서 내륙형 지식산업으로 산업구조를 바꿀 생각이었기에 내륙 지역의 인프라 투자가 엄청날 게 자명했고, 지지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1973년에 물가가 엄청나게 상승하고, 부자 상위 100명 중 95명이 토지소유자일 만큼 부동산 광란의 시기였기에 지지는 급속히 식었다. 

 

그 후에 10월 6일 중동전쟁에 의한 석유파동을 비롯한 악재로 자민당은 선거에서 엄청난 패배를 맛본다. 

  

미키 다케오 내각이 새로 나왔지만, 1976년 초 록히드 사건(다나케 가쿠에이 전 총리가 록히드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이 터지자 미키와 다나카의 자민당 파벌싸움이 격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일쇼크와 정치, 경제적 혼란속에서 시멘트 업계는 엄청난 침체를 겪게 되었다.

  

일본시멘트는 1973년 1월 323엔에서 120엔까지 하락하고 주식숫자가 2억 1606만 주 인데도 거래량이 10만주로 엄청나게 적었다. 

 

그러나, 역으로 고레카와는 정부가 민첩하게 실업자 대책을 위해 경기부양(토목공사)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매집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시멘트는 자체적으로 석회석 산을 보유해서 원료조달에도 위험은 적었기에 매집을 했다. 

 

반년 동안 30만 주를 매집해놓자 일본시멘트 지점장이 사원과 함께 찾아와서는 이 사람이 왜 샀는지? 작전꾼은 아닌지 살피러오게 되었다. 

 

고레카와가 경기부양책을 내놓을 것이기에 산다고 하자 지점장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오히려 회사경영사정을 너무 잘 알기에 그런 생각을 했을 거 같다. 

 

1977년 7월 고레카와가 매집한 일본시멘트 주식 숫자는 3천 만주를 넘어섰다. 

 

4월기 결산실적은 6억 3500만엔 적자에서 5900만엔 흑자로 돌아섰다. 영업외 수익 덕이있었지만 전망이 밝아서 전망의 잘못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 마침 일본시멘트 사장(前 회장, 고인)이 전화를 걸어 회사로 와달라고 해서 본사로 갔다.

 

당시 보유한 비율은 14.2%. 당연히 최대주주였기에 사장으로써는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총회꾼, 작전꾼이 횡횡했기에 그런 점도 있다. 

 

사장과 이야기를 했지만, 사장도 정부가 경기부양을 할거라는 고레카와의 확신을 믿지 못했다. 

 

장마가 끝난뒤에 공공사업 수주가 늘고, 중의원 선거를 자민당이 승리하자 내각은 대대적으로 경기부양 대책을 내놓게 된다. 

 

이로 인해 20일 만에 120-130엔 대에서 174엔까지 주가가 오른다. 

고레카와는 보유주식 중 1/3 가량을 180엔에서 정리한다. 

 

주가가 오르게 되자 일본시멘트 사장은 공장증설여부를 고레카와에게 묻기까지 한다. 

 

180엔을 찍은 일본시멘트는 160엔대로 하락하면서 벌써 천장을 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레카와 긴조의 명언 "벌써는 아직이며, 아직은 벌써다."를 생각하며 그는 대시세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했다. 

 

일본 시멘트는 8/31일에 213엔까지 오르고, 횡보하다가 9월 중순에 244엔까지 오르며 도쿄증권거래소 거래량 1등을 차지한다. 

  

9월 20일에 249엔의 신고가를 치고 10월 20일에는 250엔으로 다시 갱신하면서 신고가를 기록하지만, 또 다시 천정이다라는 생각이 만연해진다. 그러면서 11월 7일 202엔까지 주가가 하락함. 

 

그러나, 불황 카르텔연기와 시멘트 판매가가 25%상승하자 주가는 다시 급등하게 된다. 

 

12월 23일 337엔의 신고가를 기록하자 이번에는 반대로 아직은 벌써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주식을 처분하기 시작한다. 

 

매도가 매수보다 중요한데, 아직 천장이 아니다 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 매도를 못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매수 물량이 너무 많았던 터라(3천만주) 매도와 매수를 번갈아 가면서 설겆이식 매매를 하기 시작했다. 

 

매도를 다 끝낸지 반년도 되지않아 일본시멘트는 200엔대에서 더욱 하락하게 되었다. 

 

그 매매를 끝내고 도쿄 증권시장을 무대로 하기 위해서 1978년 11월에 도쿄 근처 시즈오카현으로 이사를 한 뒤에 비철금속 시세를 들여다본다. 

 

20년간 꾸준히 조사한 결과 구리값이 톤당 80만엔 이던게 30만엔으로 급락한 상태로 3년을 횡보했다. 

  

그는 옛 중국, 한국의 회사운영 경험을 떠올리며 반드시 반등할 거라 생각을 하고있던 상황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구리수요가 회복되면 급등할 회사를 찾던 고레카와는 도와광업이라는 종목을 선택하게 된다. 

 

도와광업은 1978년 11월 10일 110엔을 기록했다.(연중최고치 191엔) 

 

매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니혼게이자이신문(일본경제신문)을 보고, 증권사에 전화를 걸어 광물 재고량을 확인하며 그는 매매방침을 정한다. 

 

주식을 매집한지 1년째가 되는 1979년 1월 구리는 톤당 30만엔에서 50만엔까지 오르며 급등한다. 

 

1978년 11월 17일에 145엔의 도와광업 주가가 79년 3월 초까지 270엔으로 급등한다. 그러면서 고레카와는 2,200만주를 보유한 최대주주의 자리에 오른다. 

 

세계적 광산주 대시세 속에서 도와광업이 새로운 광산을 탐광한다는 뉴스까지 나오자 대만족을했다. 

 

하지만, "시세는 천정에서 가장 강해보이고, 바닥에서 가장 약해보인다"라는 격언을 여기서 깨우치게 된다. 

 

1979년 1월부터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예전부터 탐광해온 광산이 전래없는 유망한 광산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344엔까지 주가는 오르게 된다. 

 

이미 공시로 최대주주임이 밝혀진 고레카와는 내놓고 매수추천을 하게된다. 9월기 결산에서 엄청난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하며 주가는 400엔까지 오르게 된다. 

 

고레카와는 500엔에서 70%를 처분할 계획이었기에 때가 거의 다다른 것이었다.

  

주식숫자가 3천 만주로 영향이 어마어마했기에 그는 상승할 거 같은 신호가 보이면 70%를 매도하기로 했다. 

 

하지만, 구리재고의 급감과 이란 VS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정정불안과 2차 오일쇼크로 인해 세계정세는 알 수가 없는 상태였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쪽 국경에 3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배치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고레카와는 탐욕을 갖게 되었다. 

 

1980년 1월 4일 첫 장에서 도와광업은 450엔을 기록한다. 금 값도 폭등하자 800엔에서 주식을 처분하기로 고레카와는 마음을 먹는다. 

 

1월 21일에 거래량 2,566만주로 604엔을 찍자 광분하여 1천엔까지 들고가기로 한다. 

 

1월 31일 주가는 844엔, 2월 7일엔 900엔까지 뛰어올랐을때 고레카와의 보유주식 숫자는 6천만주로 전체의 30%에 달했다. (엄청난 불타기 ㄷㄷㄷ) 

 

2월 7일 종가는 860엔으로 반등할 기운이 없다시피 했고, 일본은행이 2월 8일에 금리 1%인상을 결정하면서 773엔까지 하락한다. 

 

처분할 기회를 잃어버리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하면서 낙관적 시세를 예측하는 지경에 이른다. 

 

친구와 친척과 가족의 자금까지 보탠 상황이라 오히려 당당하게 거래자체가 보유 목적이라고 인터뷰를 하며, 보유 주식을 바탕으로 복지재단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허세) 

 

하지만, 이미 하락세로 접어든 시세는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하락한다. 

 

뉴욕의 코멕스(COMEX)시장에서 은 시세가 급락하자 도와광업은 2월 7일 이후 3개월 만에 300엔대까지 퐁락한다. 

 

5월 8일 625엔, 5월 16일엔 507엔으로 하락하면서 증권사에서는 고레카와가 쓰러졌다, 입원했다는 악성 찌라시가 매일 돌아다녔다.(물론 고레카와는 증권사에 매일 왔다갔다 했음) 

 

이미 3천 만주를 처분했지만, 물량이 너무 많아서 블록딜로 노무라 증권과 쿠웨이트 정부 기관투자자등등에게 넘기게 된다. 

 

블록딜이 아니었다면 파산할 위기였다는 걸 아는 고레카와는 이번 매매를 통해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 

 

자기도 예상못한 대시세 앞에서 변해버리는 원칙은 인간의 본성을 깨닫게 해줌이 틀림없었다. 

 

블록딜로 매도하는 과정에서 반 년간 활로를 찾아 돌아다닌 탓에 몸이 나빠져서 주식을 안한다고 선언하자 두 번째 아내(첫 번째 아내는 사별함)는 기뻐한다. 

 

그러면서, 예전에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회사업을 전념하게 되고, 도와광업의 참패 이후 남은 30억 엔을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가정 아이들과 모자가정(편부모가정) 장학사업에 내놓게 된다. 

 

그 후에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가 1981년 9월 18일 아침에도 평소처럼 니혼게이자이신문(일본경제신문)을 펼쳤다. 

 

신문에는 히시카리 금광에서 고품질 금광맥 발견이라는 기사가 있었고 그는 이 광산의 광업권자인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식회사를 주목하게 된다. 

 

광업에 잔뼈가 아주 굵은 고레카와는 매장지의 대략적 조건을 보고 흥분하기에 이른다.

  

보통 금광이 채산성을 맞추려면 1톤당 10g의 금이 나와야 하는데 여기는 최대 1톤당 220.3g의 엄청난 양의 금이 묻혀있고, 지하 283m 아래라 그리 깊은 곳도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전국의 광산을 돌아다닌 경험덕에 엄청나게 빠른 추론을 해낸 고레카와는 다시 주식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내는 매우 화났지만, 결국 인정해주고 하라고 한다. 

 

금광 현장사무실을 가보자, 현장주임은 어쩌다가 하나 요행으로 발견했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그래도 고레카와는 매집을 시작했다. 

 

매집주식 비율이 16%에 이르자 또 이 회사 사장도 고레카와를 불러냈다.(지분을 무기로 삼아 경영간섭을 할 수 있으니...) 

 

고레카와는 자신있게 몇미터나 되는 두께의 금광맥이 700미터 가량 연결되어있으니 50m 간격 100m 간격으로 더 탐광해야 한다고 하며, 내가 자금을 지원해주겠다는 말까지 하자 회사는 탐광에 나선다. 

 

신문에 기사 날 당시의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가는 226엔.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재료를 이미 깠으니 고레카와는 급격하게 신용을 쓰는 매매를 하게된다. 30억엔으로 최대 미수를 걸고 주가가 상승하면 다시 상승한 주식을 담보로 걸어 담보비율을 늘리면서 매집을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1백만주 2백만주씩 던져주면서 천정이라는 느낌까지 주게 만들었다.(영화 작전이다 완전) 

 

그러자, 증권가 찌라시에서는 고레카와가 매집하는데 이거 보통일이 아니다. 라는 의견이 분분해진다. 

 

즉시 뇌동매매가 일어나고 9월 26일에 472엔을 찍고 10월엔 600엔대를 돌파한다. 그 당시 고레카와는 5천만주를 보유중. 

 

이 와중에 회사가 탐광하던 금광맥은 스미토모 금속광산이 보유하지 않은 땅까지 이어짐을 알게된다. 

 

그러자, 고레카와는 광구를 적극매수해야 한다고 했고, 그 광구 땅주인을 만난다.

 

땅 주인은 다행히도 파산 직전상태여서 그냥 얼른 5억엔에 팔겠다고 했으나, 회사에서는 시추안해보면 모릅니다. 라고하며 거부했고(더 싸게 살라고)

  

광구 주인이 파산 직전임을 알자 회사는 땅 값을 3천만엔에 쇼부보자는 말까지 한다.  

 

결국, 그렇게까지 하면서 돈을 벌고 싶지 않았던 고레카와 개인이 제 값을 주고 땅을 5억엔에 매수한다. 

 

한편, 스미토모 광산의 주가는 615엔까지 상승하다가, 재일화교그룹이 공매도를 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면서 주가가 조금씩 하락했고, 회사 측에서는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재료발표를 통해 투자심리가 더욱 악화되어 11월 16일에는 491엔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공매도 세력도 더 이상 공매도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공매도를 그만두었다.

 

고레카와는 연말을 앞두고 이번에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보냈다. (목표가는 1000엔으로 정해놓고) 

 

1982년 1월 스미토모 광산에 대한 찌라시와 억측이 난무함에도 전망이 좋아서 주가는 다시 600엔대를 회복한다.  

 

금속 광산 채취 샘플을 보니 톤당 400g이상의 금이 있는 것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자, 고레카와는 더 기분이 좋아져서 자신감이 생겼다. 

 

1월 25일 750엔(상한가)으로 마감하고, 2월 25일엔 772엔이라는 최고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어닝쇼크 전망을 회사에서 예고하였고, 굴착 데이터 발표를 회사에서 미루자 엄청나게 심리가 악화되어 420엔까지 주가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신용담보 문제가 폭발하기 직전에 이른다. 

 

현금이 필요해진 고레카와는 스미토모광산 회사 측에 지분을 일부 넘겨서 현금화하는 조건으로 저번에 사들인 5억엔 땅까지 실비로 준다는 제안을 했다. 

 

회사 사장은 금맥이 연결된 땅을 실비로 넘겨준다는 고레카와의 제안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고레카와는 쿨하게 금광맥이 연결된 걸 알게 된 걸로 만족한다며 회사에 넘겼다. 

 

이제 남은 주식수는 4,500만주. (550만주 현금화. 매도 이유는 담보 때문) 

 

그러나, 주가의 하락에는 스미토모 그룹의 의도가 있었음을 고레카와가 나중에 알게 된다. 

 

3월 17일에 늘 그렇듯이 일본경제신문(니혼게이자이신문)을 보던 고레카와는 스미토모 광산 8월 착수, 추정 매장량 100톤이라는 뉴스를 보고 경악한다. 

 

얼마 전에 매도한 물량이 아까웠지만 그것보다는 이런 엄청난 호재가 발표된다는 사실에 경악한 것이었고, 동시호가로 상한가에서 매수잔량이 2천만주나 되었다.(후덜덜) 

 

발표 당일 매수잔량은 7391만주에 이르렀고 상한가로 마감. 

 

3/ 19일에는 660엔을 찍고 주식이 엄청난 과열을 일으켰다. 

 

스미토모 광산회사 측에서는 고레카와가 블록딜한 주식에 대한 상승분까지 달라고 할까봐 애가 탔지만, 그는 쿨하게 그냥 넘겼다. 

 

아무튼, 3월 31일 1000엔대를 돌파하자 고레카와는 10일 동안 1,500만주를 매도한다. 그 후 10일 뒤에는 전부를 1000엔대에서 매도하게 되었다. 

 

마침내, 1983년 5월 2일 석간에는 그가 고액소득자 1위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게 된다. 신고 소득액은 28억 9천만엔. 엄청난 세금과 함께... 

 

그 후로는 혼다, 마쓰시타전기(파나소닉), 후지필름, 후지야(일본의 과자, 프랜차이즈 레스토랑회사)등을 매매하며 수익을 내었다.

 

스미토모 광산 매매 이후로 매매한 종목에 관한 일화는 없다시피 하니 여기서 고레카와의 일대기는 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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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기가 이것으로 모두 끝났다. 

 

투자원칙은 1부와 2부 중간중간에 쓰여있기 때문에 따로 이야기는 안하고 

1983년 이후는 책에 거의 안나와있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이미 인생의 마무리 기간이기 때문에 주식투자를 그렇게 열심히 했을 거 같지는 않기도 하다. 

 

워렌 버핏 같은 특이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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