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일본 주식투자의 신 고레카와 긴조 자서전 1부
고레카와 긴조.
1981년 일본 소득세 납부 순위표에서 1등을 기록했다고 한다.
(전설의 스미토모 광산 매매로)
1983년 5월에는 그의 이름이 일본 소득순위 제 1위를 기록했다.
이것이 모두 주식투자를 통하여 얻어낸 타이틀이니 더 대단해 보이는 거 같다.
그리고, 1987년 블랙먼데이를 예측까진 아니지만 어느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다.(블랙먼데이는 1987년 10월 19일에 다우지수가 508달러, 22.6%하락한 날)
예측에도 일가견이 있던 전에 소개한 제시 리버모어와는 또 약간 다른 듯하다.
제시 리버모어나 고레카와 긴조는 공통적으로 저학력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지 않는 대신 일찍부터 자본세계에 눈을 떴고 이를 통해 주식으로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고레카와 긴조는 주식을 거의 반평생동안은 안 해오다가 시작하게 되었다. 책을 보면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2차 세계대전이 거의 시작할 때 쯤에 눈을 뜬 듯하다.
그에 비해 리버모어는 집을 어린나이에 가출하고 바로 속칭 주식방에서 알바를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고레카와 긴조가 리버모어와 다른 점은 리버모어에 비해서 경제 동향을 중요시 여기는 편 인것도 있다.
리버모어도 어느 정도 생각은 하면서 살았겠지만, 약간 촉이 센 편이었다.
하지만 고레카와는 기업경영의 실상과 경제 동향을 살피면서 앞으로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예상하면서 10부 능선 중 2부 능선 부터 매집을 하다가 정해진 지점이 오면 매도를 하는 스타일이다.
고레카와 긴조의 유일한 자서전인 이 책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거의 대부분이고, 마지막에는 투자철칙 비슷한 것이 담겨있다.
투자철칙은
1. 종목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공부해서 고를 것.
2. 2년 후의 경제 변화를 스스로 예측하고 대국관을 갖는다.
3. 주가에는 타당한 수준이 있다. (PER, PBR, ROE등을 말하는 듯하다.) 상승하는 주식을 마구 쫓아가는 것은 금물.
4. 주가는 최종적으로 실적으로 결정된다. 완력 시세는 경원한다.
5. 불측의 사태 등 리스크를 마음에 둔다.
과다한 생각은 하지 말고, 수중의 자금안에서 행동한다.
이와 같은 투자관을 갖고 있고, 신용매매와 작전세력에 대한 조그마한 비판도 들어가있다.(물론 고레카와 자신도 신용매매를 여러번 했고, 깡통 찬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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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고레카와씨의 대략적인 인생스토리를 이야기 하자면, 1897년 일본의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승리로 인하여 일본이 해외 진출을 하던 시기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베에 요시모토상회에 들어가게 된다.
그 회사는 영국으로 부터 무역을 하는 회사였고, 여기에서 일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 만화를 보고 그는 반드시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시모토상회가 빚으로 도산하고 고레카와는 고용된 사람은 회사가 없어지면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을 체감하고는 사업을 하기로 맘 먹는다.
그러다가, 영국유학을 꿈꾸며 30엔을 들고 중국으로 이동해서 일을 하지만 때마침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태가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번지며 영국으로 갈 수 없게 되고, 중국 대련(다롄)에 머무르게 된다.
1차 대전 뿐만아니라 중국땅에도 전쟁이 난 걸 보고 군수용품 상인을 하려하지만 그 당시 고레카와의 나이는 십대 중반.
나이도 어린데 누가 그를 상인으로 쓰려고 하기나 하겠습니까?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따라서 상인으로 써달라고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고레카와가 한 눈을 파는 사이 일본군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외딴 나라에서 개죽음을 맞을 뻔한 상황에서 그는 사력을 다해서 들개를 피해 일본군을 따라가고(들개를 피해서 도망가는 노하우도 쓰여있으나 생략), 일본군 부대의 일장기를 보고 긴장이 풀리자 부대 진지 앞에서 기절했다.
그 후에 일본군 취사부대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군인이 아니라 일본으로 강제송환 될 상황이어서 뭐라도 해야했는데
마침 회계실에 병사들이 주판을 하도 못 만지길래 고레카와가 주판 실력을 보여주니 다들 감탄하게 되었음.
그 후, 능력을 인정받게 되자 일본으로 강제송환 당하지도 않았고, 회계 담당소위의 신임을 얻은 뒤에 돈을 빌려서 장사를 시작했다.
일본군 병사를 데리고 중국인과 거래할 때 중국인들이 일본 병사들에 쫄아서 숨어있자, 그는 돈을 책상에 놓고 물건을 정량대로 가져가면서 중국 상인과 신뢰를 쌓고, 거래를 트게 되었다.
1914 / 11 / 7일에 청도(칭따오)를 일본이 점령하게 되면서 일본군을 따라 청도에 들어가게 되었고 고야마양행(원래 이름이 고야마 긴조였으나, 아내쪽 집안 양자가 되고 바꿈)이라는 회사의 군납업자가 된다.
그 후에 전쟁이 없게 되자, 군인들이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유흥산업을 발전시키게 하였고, 군인들은 유흥을 마음껏 즐겼다.
그에 맞추어, 군간부들에게 게이샤나 뇌물을 바쳐 장사를 하다가 경쟁자의 질투를 사서, 고발로 헌병대에 끌려가게 되지만 고레카와 긴조가 군부 고위층 이름을 입 밖에 내놓아서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신원이 당시에 미성년자라서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
여기서 조사 담당 중위는 너는 정도(正道)를 걸으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라고 말했고, 여기서 부끄러움을 느껴 회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빈털터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돌아와도 일본은 전쟁 중인 상황도 아니라서, 일본에서는 할 게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다시 청도로 가게 되고 중국 화폐를 녹여서 일본에 파는 장사를 하게 된다. 그 당시 중국은 당시 원세개와 쑨원이 정치적 다툼을 하던 시기라 어지러운 상태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일리전이라는 금속 화폐를 많이 모아둔 상황이었고 1차 세계대전 여파로 비철금속이 폭등한 상태라서 화폐를 사 모아 녹여서 순수 금속으로 팔면 이득을 보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화폐 주조는 중국 법으로는 사형이었기에 치외법권을 가진 일본인만이 이 방법으로 돈을 벌게 된다.
중국 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일본 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 정부는 일리전 수출금지령을 내린다.
이 사업을 하는 회사 직원들이 길바닥에 나 앉고 자기 사업도 망하게 될 것 같은 상황에서 고레카와는 협상장소에서, 일본관료 앞에 총을 들이밀고 담판을 하면서 일리전 판매에 대한 협상에 성공한다.
협상에 성공하고 일리전을 녹이는 회사를 고물 수집회사로 잠시 둔갑시켜서 검사를 받고 통과하자 다시 원래 하던 사업을 하게된다.
당시 중국은 쑨원(손문)과 원세개가 대립하고,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일본 배척을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은 쑨원을 지원하는 정책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고레카와는 일본군 간부와 밀약을 맺는데 내용은 이렇다.
쑨원쪽부대에는 만주에서 데려온 비적 300명이 있는데 그들이 먹을 식량과 무기를 지원해주면 중국 청주를 점령할 수 있으니 3만엔(자서전에는 지금 돈으로 따지면 5-6억엔이라고 했음)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 간부는 당시 원세개의 중국 정부군이 속칭 당나라군대니 그냥 가능하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점령하지 못했고, 일본군 간부도 낯도 두껍게 다시 한 번 지원해주면 된다고 하더니
원세개가 갑자기 죽어버리자 일본군 간부는 입을 닫았고, 비적이었던 쑨원쪽 무리도 약속을 지키진 않았다.
(원세개가 죽고 중국 남부 쪽은 쑨원과 친한 군벌 쪽이 권력을 바로 얻게 됨)
곧이어, 독일 황제가 미국의 당시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전화를 하면서 전쟁이 종결되는 듯한 신호를 내보내자 비철금속이 폭락해 일리전 장사를 못하게 되자, 자살할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채권자들에게 진심을 다하여 사재를 다 털면서 당시 19세 였던 나이까지 밝히자 채권자들은 장래를 걱정해주며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 일본은 병역징집이 있어서
고레카와의 부모님은 고레카와가 병역 징집이 되면 얘가 밖으로 안 싸돌아 다니겠다. 하면서 좋아했지만
병역징집을 피하기 위해 잠시 이사를 갔다와서 징집을 피하고 다시 고베에 머무르지만(자세한 병역 회피방법은 생략)
곧바로 오오사카로 이동해 오오사카 신철아연도금 주식회사를 경영하게 된다.
여담으로 나오지만, 회사를 경영하다가 건강이 급하게 나빠지자 생활습관을 채식위주로 하고 술과 여자를 멀리하게 되었고, 이게 장수의 비결이 되었다고 한다. (자서전을 쓸 당시가 1990년이었으니 엄청난 장수)
그러다가 1923년 9월 1일에 관동대지진이 터지게 되면서 요코하마는 전멸에 가까운 상태라는 찌라시를 보자 도쿄는 볼 것도 없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거라 생각하며 아연판을 대량으로 매점해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연판을 파는 상인이 관동대지진을 알게 되자 팔지 않으려 했지만, 미리 계약을 해놓아서 결국 팔게 되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돈이 별로 없는 노무라은행에서 담판을 통해 레버리지를 쫙 댕겨서 엄청난 돈을 벌고 빚을 모두 갚게 된다.(신용쓰기의 달인)
그리고, 수익의 반은 오오사카부에 기부.
1927년 3월에 중의원 선거 유세과정에서 재무대신이 뜬금없이 멀쩡히 운영하는 은행이 도산했다고 하자, 은행들이 줄줄이 도산을 거듭하게 된다.
그리고, 1927년 연말에 오오사카 신철아연도금 주식회사도 대공황으로 인하여 도산하고 만다.
그 후에, 고레카와는 3년간 도서관을 다니며 자본주의를 싹 흝어보게 되고, 결론은 자본주의에선 싸이클이 있지만 절대 망하진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아내가 입에 풀칠을 해주며 살았지만, 자식들은 아버지를 존경했다고 함. 교육방식은 모르는 게 있으면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나머지는 니가 알아서해라라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1931년 12월 전쟁전 최후의 내각에서 금 수출 금지기조를 유지하자 주가는 대폭등을 이뤄냈고
그 상황에서 고레카와가 주식하는 사람들을 보니 답도 안나오는 인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면 훨씬 잘하겠네" 하고 고레카와는 주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함.
나이 34살에 주식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당시 매매는 개인이 80%로 주도하는 중이라 적당히 잘만하면 돈을 벌겠다 생각한 모양.
겨우겨우 아내가 쥐어짜서 건내준 70엔을 갖고 예전 철강회사 때 자신이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나서 200엔(당시 매매단위는 10주 였고, 증거금이 200엔 필수)으로 레버리지를 일으켜 매달 100엔씩 집에 생활비로 보내주며
1년 만에 70엔을 3500엔으로 불렸다. 그러면서 명성을 얻고 고레카와 경제 연구소의 전신인 사무실에 초청을 받아 그 곳 우두머리로 추대된다.
그 후에 한 대학생이 그 고레카와 경제 연구소에서 나온 자료를 바탕으로 시험문제를 풀자 교수가 깜짝놀라 강의를 해달라고 찾아와서 초졸출신인 고레카와 긴조가 강단에도 섰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1931년에 영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한다는 것도 예측하고, 데이터를 통해서 미국의 금본위제 폐지도 예상하며 미리 증권사에 주식을 정리해달라고 한다.
1933년 4월 19일 7:50분 즈음에 미국이 금본위제를 폐지한다고 하자 개폭락으로 레버리지를 낀(미수거래를 의미하는 듯) 일본 증권사가 도미노 식으로 도산할 위기에 놓이자 정부는 아예 거래 중지를 며칠 이어가고, 사상초유의 판단을 내렸다.
"미국이 금본위제를 중단하기 전의 종가로 결제한다"
결국 이를 통해 거의 이득을 못 봤음에도 분석이 적중한 것 이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1931년 9월 18일 만주철도 폭파(일본군이 조작)가 일어나자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고레카와는 정황상 일본정부가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이게 군대의 귀에 들어오자 압송된다.
여기서 오히려 당당하게 주장을 했고(사실 뒤에 빽이 있었음.) 뒷배경에 의하여 구속이 거부되자, 오히려 고레카와에게 세계의 정세를 배우라는 명이 군인들에게 내려졌다.
논란이 되겠지만, 그는 영국과 미국을 공격하지 않으면 일본은 패망한다는 주장을 했고 국가별 예산 분석을 통해서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소련이 일본을 집중공격 할 것을 예상하며
제 2차 세계대전을 예견한다.
그러면서 33~38년까지 군대에 자문을 하며 주식매매를 멀리하다가 철강자원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당시 식민지인 조선으로 건너가 광산을 세운다.
나이 40에 철강회사 때 직원 15,16명을 데리고 조선에 가서 고레카와광업을 세운다.
여기서 광산에 대한 지식을 모조리 얻고, 한반도의 대부분의 산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강원도 횡성의 정곡금광을 시작으로 광산개발을 막 하다가 직원 3천명의 고레카와 광업까지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고이소 조선총독과 인연을 맺어 순탄하게 회사운영을 하게 되었다.
(조선총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요시모토 상회에 다닐 당시에 알던 지인이 나중에 일본 극우파의 대빵정도 되는 정치인이 되었기에 그를 통하여 조선 총독의 도움을 받게 됨.)
그 과정에서 한국인을 심하게 대하는 사람을 보고는 총독에게 경고를 주라하면서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해임하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그만큼 파워가 강했다는 말)
후에, 1944년 전범으로 유명한 도조 히데키 내각이 총 사퇴하자
일본 내각의 총리로 고이소 조선총독이 가게 되면서 고레카와를 경제 자문으로 쓰려고 했으나
일본의 패망을 이미 예견했던 터라서 가지 않았고, 국가의 녹을 먹어도 관선보단 민선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고레카와는 1945년 말에 식민지 한반도에 있을 예정인 의원선거(관선, 민선중에 민선)에 나가려고 했으나, 한국의 해방으로 나가지 못하게 됨.)
그러다가, 1945년 한반도에 있던 고레카와의 제철공장도 연합국의 폭격대상이 되어 시설이 싸그리 뭉게지고 일본열도도 폭격의 바람에 휩싸이게 되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재산을 전부 몰수 당하고
고레카와는 한국 임시정부 경찰에 잡힌다.
하지만, 한국인과 일본인 직원을 같은 대우를 해주며 경영했던 것과 직장 근처에 의무교육 수준의 학교를 세워준 덕분에 한국인들의 구명을 받으며 풀려나서 일본으로 돌아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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