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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현 여행 가볼만한 곳, 기후성(21/11/23)
세키가하라에 이어서 기후현 여행을 계속했다. 기후성도 가보기로 했는데, 기후성은 오다 노부나가가 거점으로 잡기도 한 곳이었다.
사실 오다 노부나가가 점령하기 전에는 사이토(齋藤) 가문에서 갖고 있던 영지였는데, 오다 노부나가가 침범하여 빼앗았었다.
기후역에 도착하면 오다 노부나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금색으로 되어 있는데 오른손에 잡고 있는 건 칼이 아니라 조총이다. 당시에 오다 노부나가가 적극적으로 해외 문물을 받아들였고 상업도 장려했었는데
물론 당연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런 적극적 개방 정책으로 조총도 빨리 받아들였다.
그 조총을 활용해서 당대 일본 내에서 최강의 기병부대라고 불리는 다케다 신겐의 부대(물론 싸울 땐 그 아들이랑 싸움)를 물리쳤다.
그런 걸 생각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조총을 쥐어준 것으로 보인다.
기후역에서 버스를 타도 갈 수는 있기는 한데 난 역시 걸어갔다. 한 기후역에서 기후성으로 가는 산 입구까지는 3~4키로 떨어져 있는 거 같다.
산에 올라가는 길에 큰 절 같은 게 하나 있었다.
선광사라고 쓰여있었다. 일본어로 읽으면 젠코우지라고 해야하나? 찾아보진 않았음.
산의 거의 입구 근처까지 오니까 사이토 가문의 집으로 보이는 곳도 있었다.
사이토 도산이라는 사람이 사이토 가문에서 유명하다.
기후성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솔직히 알아보진 않고 그냥 왔다.
평소에 운동을 거의 안해서 올라가는 건 힘들고 마스크를 꼈다 벗었다 하느라 힘들기도 하고 중간에 쉴 때도 있었지만, 걷는 거 자체는 빠르게 가서 한 40분 정도 걸렸던 거 같다.
산에서 중간에 사람들을 만나면 こんにちは하고 인사를 하는데 해주면 답은 하는데 이걸 꼭 해야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기후성에 거의 코앞에 가까운 지점에 전망대가 있다. 기후시내가 다 보이는 수준인 거 같다.
스타디움 같은 것도 잘 보인다. 근데 비가 아주 조금씩 왔다가 그쳤다가해서 약간 불안했었다.
더 가면 기후성의 입구로 들어갈 수 있다.
기후성이 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기후성은 그렇게 큰 성은 아니다. 산 속 깊은 곳에 있어서 크게 지을수도 없고 그래서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도 없다.
또한, 많은 식량을 둘 수도 없고, 성에서 지켜려고 해도 물길을 끊어버리고 극단적이게는 불을 질러버리면 방어가 안돼서 딱히 방어용 성은 아니었다.
기후성에 가니까 또 갑자기 날이 개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사이토 가문이 지배하던 기후성(당시는 이나바야마성)을 점령한다. 점령하는 과정에서 사이토 가문 내부 배신자를 이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 반란을 일으킨 아케치 미쓰히데가 사이토 가문에 있다가 오다 노부나가 밑으로 들어온 인물이었다. 자기가 한대로 당하는 역사의 역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후성은 200엔 입장료가 들었다. 다른 성보다는 입장료가 싼 편이다. 로프웨이(케이블카)가 있는데 이게 돈이 700엔인가 드는 것 같다. 또 안에 들어가보니 성 안이 좁아서 싼 가격일만도 했다고 본다.
기후성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것도 있다. 공자와 관련된 것에서 한 글자를 따오고 나머지는 또 다른 쪽에서 따와서 기후(岐阜)가 됐다고 봤던 기억이 난다.
오다 노부나가가 개방을 하면서 주로 포르투갈, 조금 이후에는 네덜란드와 주로 교류를 했는데 포르투갈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일본에 오래 머무르면서 기록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아래를 내다보는 풍경이 괜찮았다.
당시에 지구본도 있고 안경도 있었던 거 같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에는 당시 거의 2인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서쪽(지금 히로시마, 기타큐슈 쪽)의 모리 가문을 공격하러 갔었다.
그런데, 모리 가문이 꽤 강해서 히데요시가 구원병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고 오다 노부나가는 구원병을 보내기로 하고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1만명 정도의 구원병을 준다.
구원병을 인수받은 아케치 미쓰히데는 어쩐 일인지 교토에 있는 혼노지로 가서 병사들에게 적은 혼노지에 있다고 말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이미 여기까지 온 상황이고 명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그대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오다 노부나가는 당시 100명 정도 호위병 밖에 없어서 분전했지만 결국 죽게 된다.
여의치 않자 절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미스터리로 이야기 되는 게 시체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근데 뭐 불 질렀으니까 타서 없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체를 못 찾은 거랑 일본의 역사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처럼 이건 딱 믿고 가는 기록이다 할 만한 게 거의 없고 각종 설화(오다 노부나가가 살아서 탈출했다 이런 이야기)가 많아서 별의 별 얘기도 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아케치 미쓰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예수회의 꼭두각시로 보고 죽였다는 이야기도 나돈다고 한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불교의 폐단을 억제하려고 크리스트교 등도 정치에 개입만 안하면 포교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한다.
죽었을 때 옆에 있던 호위병 중에 야수케라는 흑인 사무라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야수케는 생포당했으나 아케치 미쓰히데는 야수케를 보고 너 같은 미물이 뭘 알겠냐면서 그냥 풀어줬다고 한다.
흑인도 능력이 있으면 등용한 오다 노부나가랑은 완전 다른 모습이다. 그 점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시대는 예전이었지만 자유주의에 가까웠다고 난 생각한다.
그 뒤에 아케치 미쓰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자 노부타다도 죽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또 이걸 놓치지 않았다.
교토에서 사자가 와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히데요시에게 알려주는데 히데요시는 그 사자에게 그 사실을 누가 알고 있냐고 물어봤고, 자기만 안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사자를 죽여버렸다.
자기만 이 정보를 알게 딱 틀어막고, 상대중인 모리 가문에게는 우리가 마음먹고 들어가면 너네는 그냥 끝낼 수 있는데 성주가 할복하면 봐줄게 하고 서신을 보낸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는 줄 모르는 모리 가문은 그 정도면 땡큐하면서 성주가 할복하고 히데요시 군은 성주가 죽는 걸 보고 빠르게 교토로 돌아가서 우유부단하게 헤매던 아케치 미쓰히데 군대를 제압한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패배해서 도망치다가 농민들의 손에 죽었다고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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